기도와 성화의 관계
기도와 성화의 관계
기도와 성화의 관계를 성경신학적으로 풀어 보려고합니다. 핵심은 하나입니다. 기도는 성화를 ‘얻어내는 기술’이 아니라, 성화가 ‘진행되는 자리’이며 성화의 ‘호흡’입니다.
성화는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구원의 과정 안에 있고, 기도는 그 과정에 참여하는 가장 본질적인 방식입니다. 성경신학적으로는, 창조–타락–언약–그리스도–성령–교회–새 창조라는 큰 흐름 속에서 기도와 성화가 어떻게 맞물리는지 보아야 합니다.
먼저 성화가 무엇인지 정리해야 합니다.
성화는 흔히 “도덕적으로 더 착해지는 것”으로 축소되지만, 성경의 중심은 더 깊습니다. 성화는 하나님께 구별되어(거룩)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삶의 변형입니다. 그것은 단지 행동의 교정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욕망, 사랑, 두려움, 소망)이 하나님께로 재정렬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성화는 단발성 결단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점진적이고, 때로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긴 여정입니다. 이 여정에서 기도가 왜 핵심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구원을 ‘법정적 선언’(칭의)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롭다 하신 사람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실제 삶을 새롭게 하십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고 말합니다. 성화는 내가 시작한 자기 개선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착한 일’의 전개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인간이 ‘구경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에 인간이 믿음으로 응답하며 동참하는 통로입니다.
성화가 은혜로 시작되듯, 기도도 은혜로 시작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들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로마서 8장,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흐름).
성경신학적으로 보면,
기도는 처음부터 언약의 언어입니다. 창세기의 족장들은 단지 “복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언약 백성이었고, 그 언약 관계는 부름(말씀)–응답(믿음)–동행(삶)으로 이어집니다. 기도는 언약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핵심 표현입니다. 시편이 성화의 교과서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시편은 성도의 감정이 정화되고 욕망이 재구성되며 하나님을 향해 재배열되는 과정을 ‘기도’라는 형태로 보여줍니다. 즉, 성화는 단지 죄를 덜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더 갈망하게 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 방향 전환이 가장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장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제 신약으로 넘어오면,
기도와 성화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더 선명해집니다. 예수님은 단지 기도를 가르치신 분이 아니라, 기도하시는 분으로 복음서에 등장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성화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도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로 기도의 방향을 바꾸십니다. 여기서 기도는 “내 소원 성취”가 아니라 “내 의지의 성화”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이 아버지의 뜻 안에서 정돈되고, 그 뜻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지점이 기도에서 벌어집니다. 성화는 결국 “원함의 변화”이며, 기도는 그 변화를 낳는 가장 실제적인 자리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무엇을 얻기 위해 기도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고, 기도 속에서 우리의 원함 자체를 바꾸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축은,
성화가 개인의 결심만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관점을 성경이 거부한다는 점입니다. 신약의 성화는 결정적으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이 성령의 열매를 말할 때, 그것은 “너희가 노력하면 열매가 열린다”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성화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가는’ 삶이며, 기도는 성령의 인도에 민감해지는 삶의 방식입니다. 기도는 성령을 ‘불러내는 주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감각을 깨우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은 성화의 장이면서 동시에 기도의 장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삶과 성령을 따르는 삶을 대비하고, 그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탄식으로 기도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기도 자체가 성화의 도구라기보다, 성화의 엔진이신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는 길임을 뜻합니다.
여기서 성경신학의 중요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성화는 전적으로 은혜이지만, 인간의 책임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화의 구조입니다. 하나님이 소원을 두게 하시고 행하게 하시지만, 그 은혜는 인간의 인격과 의지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새롭게 하여 순종하게 만듭니다. 기도는 바로 이 구조를 가장 잘 드러냅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청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내 안에 소원을 두시고 내 입을 열게 하시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화의 증거이자 성화의 수단입니다. 기도가 전혀 없는 신앙은 성화의 생명력이 약해진 신앙일 가능성이 큽니다. 반대로 기도가 살아나면, 이미 그 안에 성화의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기도가 성화를 촉진하는 방식은 성경적으로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도는 죄를 조명하고 회개를 낳습니다. 시편의 많은 기도는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자기 폭로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라고 고백할 때, 죄의 문제는 단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으로 다뤄집니다. 회개는 성화의 문이며, 기도는 그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둘째, 기도는 욕망의 재정렬을 낳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신앙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선순위는 머리로 아는 것만으로는 잘 바뀌지 않습니다. 우선순위는 반복된 기도 속에서 바뀝니다.
셋째, 기도는 관계의 회복을 낳습니다. 성화는 ‘홀로 거룩’이 아니라 공동체적 열매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점점 원망과 정죄에서 빠져나와 용서와 긍휼의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주기도문이 “우리”로 시작하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로 이어지는 것은 성화가 관계를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기도와 성화를 다시 묶어야 합니다. 성화는 단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된다”가 아닙니다. 성화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내 삶의 영역(말, 돈, 성, 시간, 관계, 분노, 두려움, 야망)에 점점 더 깊이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내 삶 속에 초청하는 행위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성화의 핵심 청원입니다. 그 기도가 진짜가 될수록, 내 삶의 작은 선택들이 달라집니다. 덜 불안해지고, 덜 과시하고, 덜 통제하려 하고, 더 사랑하고, 더 기다리고, 더 진실해집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대개 큰 사건이 아니라, 골방에서 반복되는 기도 속에서 천천히 자라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기도는 성화를 만들어내는 마법의 지팡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는 성화가 진행되는 가장 실제적인 장이며,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는 호흡이며, 하나님 나라가 내 존재를 다스리도록 문을 여는 행위입니다. 성화는 기도의 결과가 아니라 기도와 함께 움직이는 동행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성화되고 싶다”라고 말한다면, 성경신학적으로 가장 먼저 권할 실천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미 성화의 길 위에 들어섰다는 가장 분명한 표지이기 때문입니다.